Ancient Library
[개관]인류가 문명사회를 접하게 된 것은 기록을 하게 되면서 부터이고 문명사회를 이루고 발전시키게 된 것은 기록을 보존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따라서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겨난 고대도서관은 인류문명의 발상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대의 자료들은 대체로 절대권력자의 궁정, 통치, 군사의 기록이나 종교성전이었다. 또 당시의 귀족, 부호, 등도 개인적인 기록이나 개인문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록자료들은 궁궐이나 정청안에 보존된 자료들과 동일한 것이 많았으며, 그 외는 가문의 가계보, 업적, 기행, 수학, 의학, 생활의 지혜, 주술, 종교성전 등이었다. 당시의 통치자나 귀족 또는 개인들이 이와 같은 기록물들을 모으고 소장하고자 했던 것은 정치적, 종교적, 재산상에 있어서 권위와 존경, 부를 누리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고, 행정상의 판단인 지령 및 종교상의 의례와 제사 등을 위한 참고자료로서 모으고 간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와 로마의 전쟁으로 당시 학자들에게는 조금 다른 이유로 도서관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갔다. 생활과 학문 발전에 있어서 기록물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이용자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관문고와 문서관 및 개인문고가 보존문고에서 자료실 혹은 도서관 성격을 갖고 이로인해 새로운 도서관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 있어서 도서관은 어디까지나 왕족, 귀족, 승려 등과 같은 일부 특수층의 전유물로서 당대의 기록보존을 위한 권위와 존경의 상징을 위한 것이었으며 오늘날과 같은 민중의 도서관은 아니었다.[출처] 도서관 의미의 시대적 변천
고대 도서관의 흔적
고대 문헌보존소는 문서보관소였는지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었는지 확실치 않으며, 도서관의 발생에 관해서도 아직 불명확한 점이 많다. 다만, 사원이나 왕궁에 부속되어 존재했던 점은 확실하다. [관련글] 메소포타미아 건축 (1)수메르 건축
- 기록상 최초의 왕궁도서관은 BC 2300년경의 Ebla 왕궁도서관
- 우르 남무 왕궁(왕립법률)도서관 : BC 2100
- 함무라비 왕립도서관 : BC 1700
- 힛타이트 왕궁도서관(The Royal Library of Hattusha) : BC 1700
- 아슈르바니팔 왕궁도서관 : BC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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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푸르의 점토판과는 달리 에블라에서 발견된 점토판들은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공문서보관실 자체를 발견한 것으로서 이른바 최초의 왕궁도서관의 발견으로 기록되었다. [관련글]에블라(Ebla) 새로운 언어의 발견 이 점토판의 대부분은 왕궁행정에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물들이었으나 일부의 경우 수메르신화의 원문이 새겨져 있는 등 다양하였다. 이 방은 당시 왕궁필경사들이 사용하던 도서관으로 추측하고 있다. 니푸르의 경우와 비교하여 보아도 도서목록작업의 존재(카타로그)가 발견되는 등 진보된 고대도서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The Royal Library of Hattusha
하투샤 [Hattusha] 히타이트왕국의 수도로서 해발 약 1000m의 고원, 기복이 심한 비탈면에 뷔위칼레 유적에서는 '보가즈쾨이 문서'라고 하는, 설형문자가 새겨진 
건설되었다. 동서 길이 약 1.3km, 남북 길이 약 2.1km이고 약 8km의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현재 도시 북쪽에는 아시리아 상인들의 거주
터가 있고, 중앙부 동쪽 끝 고지대에는 BC 13세기에 세워진 왕궁이자 성
채인 뷔위칼레 유적이 있으며, 남쪽에는 대신전 유적이 남아 있다.
성벽에는 왕의 문과 스핑크스문·사자문 등이 설치되어 있다.
점토판 조각들이 2만 장 이상 발견되었다. 이 점토판에는 히타이트왕국의
역사, 궁정에서의 인간관계, 상급관리에서 하급관리에 이르는 조직도 등이
적혀 있다. 대신전 유적은 현재 건물의 기초부분만 남아 있는데, 저장고
터에는 식량이나 신전의 물건을 보관하던 커다란 항아리들이 발견되었다.
성벽 밖에서 동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 야질리카야(문자가 새겨진 바위) 신전은, 자연바위 틈을 이용하여 만든 크고 작은 2개의 회랑과 바위 앞에 지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대회랑 바위에는 기후 신 테슈브와 태양의 여신 헤파투를 선두로 한 총 66명의 남신과 여신 행렬을 나타낸 부조가 새겨져 있다. 1986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참고] 터키의 세계유산 (1) 4. 하투샤 (Hattusha)
에블라 왕궁도서관 이후 도서관의 역사에서 의미를 갖는 발굴은 터키 앙카라 근방의 하투샤 왕궁도서관이다. 하투샤는 BC 17~13C의 히타이트왕국의 수도였는바, 이곳에서는 다량의 행정문서 이외 바빌로니아 번역서사시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중 일부 점토판에서 본문이 끝나는 판 뒷면에 오늘날 책의 앞부분의 표제지에서 볼 수 있는 판권표기(colophon)방식을 나타내는 기록까지 발견되었다.
The Royal Library of Tiglathpileser I
에블라나 하투사스도서관과는 달리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의 도서관이 발굴됨으로써 도서관의 설립자를 거론할 수 있게 된다. 이곳의 다량의 점토판들은 기록물도 비슷하고 점토의 재질도 비슷하며 연대의 상당한 표시들이 바로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 통치기간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점토판들이 그가 세운 도서관의 일부로서 학술조사가 맞는다면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는 알려진 최초의 도서관 설립자라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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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글라트필레세르 1세 [Tiglathpileser I, ?~BC 1077 ?] 아시리아의 왕(재위 BC 1115?~BC 1077?). 북방의 나이리 지방을 포함한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아랍인(人)을 추방, 남방의 바빌로니아를 지배하에 두었고, 시리아 및 소아시아로 진격하여 국위를 크게 떨쳤다. 수도 아수르의 전승기념주에는 42개국을 평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수르의 아누 아다드 신전을 수복(修復)하는 등 위대한 건설자이기도 하였고, 또한 전차대(戰車隊)도 창설하였다.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Tiglathpileser III, ?~BC 722)는 재위(BC 746∼BC 722) 동안 바빌로니아와 우랄투를 토벌하는 등 아시리아 제국 황금시대의 기초를 다졌다. 공성구(攻城具)를 고안하고 군제(軍制)를 개혁하였으며 군현(郡縣)제도를 확립하였다.
근동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약 50만장의 점토판이 발굴되었는데 점토판의 모양은 장방형의 직사각형으로 앞면(내용이 기록된 면)은 볼록면, 뒷면은 오목 면이며 보관할 때는 뒷면 즉 오목편이 위로 드러나게 하여 파손을 예방하였다. 또한 오목 면에는 제목을 새겼으며, 소유주의 이름, 寫字生(사자생)의 이름을 새기고 어떤 경우는 점토판을 주의 깊게 다루라는 경고문을 써 놓기도 하였다. 한편 쓸모없는 점토판은 도로나 바닥의 보도블록으로 이용하거나 한곳에 쌓아 놓았다.
The Royal Library of Ashurbanipal
기원전 700년에서 기원전 600년경에는 아시리아가 이 지역을 지배하였고, 가장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 아슈르바니팔王(Assurbanipal 재위 BC 668- BC 628)은 기원전 668 년경에 수도를 니네베(Nineveh, 고대의 Kouyunjik)에 정하고 신하들을 교육하기 위한 시설로서 왕궁에 거대한 점토판 도서관을 세웠다. 약 2만 여점의 점토판이 발견된 이 유적이 바로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집약한아슈르바니팔도서관이었던 것이다.(아슈르바니팔왕은 왕립학자 겸 전문필경사를 둔 오리엔트의 몇 안되는 왕 중의 하나였다.), 1850(1849?)년 영국의 고고학자 A.H.레이어드의 니네베 발굴에 의하여 고대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왕의 도서관 유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여기에는 약 1만 이상의 문서가 있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점토판 장서들은 신하들의 교육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며 공중의 이용을 위하여 궁전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도서관의 역사가인 에드워드 에드워즈(Edward Edwards)는 이를 ‘점토판공공도서관(public library in clay)’이라고 기술하였다.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은 단순한 정부의 문서보관소가 아닌, 체계적인 관리하에 조성된 실질적인 최초의 도서관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612년 메디아의 침공 당시 방화로 인해 단단하게 구워짐으로써 점토판들은 우리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660여개의 쐐기문자로 기록된 의학 관련 점토판들은 후에 톰슨에 의해서 출판되었다.(published in facsimile for the first time by Reginald C. Thompson as Assyrian Medical Texts. From the Originals in the British Museum (1923)
To deter thieves, Ashurbanipal had the following curse written on many of his tablets. It is the earliest known book curse:
“I have transcribed upon tablets the noble products of the work of the scribe which none of the kings who had gone before me had learned, together with the wisdom of Nabu insofar as it existeth [in writing]. I have arranged them in classes, I have revised them and I have placed them in my palace, that I, even I, the ruler who knoweth the light of Ashur, the king of the gods, may read them. Whosoever shall carry off this tablet, or shall inscribe his name on it, side by side with mine own, may Ashur and Belit overthrow him in wrath and anger, and may they destroy his name and posterity in the land" (Drogin, Anathema! [1983] 52-53).
BC648년 바빌론의 지배자였던 이복동생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위대한 문화도시인 바빌론의 점토판들을 수레에 싣고 와서 자신의 개인장서와 함께 진열하였고 필사본을 계속 만들어 추가하였다.
"Recent cataloguing in the British Museum has enumerated some 3,700 scholarly tablets from Ashurbanipal's Library written in Babylonian script and Dialect — about 13 percent of the entire library. Ashurbanipal's obsessesion with Babylonian books did not, then, completely overwhelm indigenous production, but he did view them as highly valuable cultural capital; their forced removal to Nineveh undermined Babylonian claims to the intellectual heritage of the region and thus pretensions to political hegemony, while reinforcing Ashurbanipal's own self-image as guardian of Mesopotamian culture and power" (Robson, "The Clay Tablet Book," Eliot & Rose (eds) A Companion to the History of the Book [2007] 77).
아슈르에 있는 티글라트필레세르의 도서관으로부터도 점토판을 가져왔음도 기록의 파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발굴에 의하면 왕궁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점토판이 흙 상자에 보관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점토판을 구별하는 식별표지가 있었으며, 점토판을 여러 개의 구획으로 배치하고, 각 구획에는 일종의 시각표지물인 소장 자료 목록이 있어서 장서를 분류하여 조직해 놓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슈르바니팔도서관의 장서의 특징은 문학적인 저작물 보다는 실용적 문서와 아시리아 학자들의 예언서(omen)등 주로 학문적 문헌이 많다는 것이다.
아슈르바니팔의 시대에 왕의 정책은 많은 부분 예언에 의해 세워졌다. 왕에게는 자신들이 적절한 문학작품에서 인용했던 것들을 정당화하고, 예언을 해석하고, 이에 따라 행동지침을 마련해 주는 조언자들이 있었다. 점토판 판권 표기에 아슈바니팔의 '신성한 명상과 암송을 위하여', '왕의 논평을 위하여', '왕의 독서학습을 위하여' 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도서관은 왕의 인용의 정확성이나 성향을 파악하는 미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용도야 어쨌든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은 다른 도서관들이 그렇듯 전문적인 참고도서관이었다. 소량의 순수문학작품들의 존재는 다른 장서들과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이 이용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창조의 서사시는 새해 축하행사 중에 낭독되었고, 이라의 서사시는 역병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아와 같은 인물인 우트나피슈팀의 신화는 탄생에 도움을 준다고 믿었다.
종합해보면 근동의 장서는 그 지역과 시대의 문명의 욕구를 채워주는 특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근동문명이 끝날 때 그 장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와 로마세계에서 생겨났던 보다 확장된 수평선상으로 연결되는 도서관문화의 시초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근동의 장서(점토판들)은 역사적인 기록 속에 당당히 들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장서의 제목을 달아 각 작품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 비슷한 작품을 전집으로 묶는 것, 도서목록을 만드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도서관 절차 중 몇가지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출처]고대 도서관의 역사(라이오넬카슨著)
[관련글] 메소포타미아 건축 (2)앗시리아 건축 /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
One of the greatest early Ashurbanipal's Library. 왼쪽은 길가메시서사시로 유명한 Flood tablet. 아슈르바니팔왕의 도서관의 점토판들은 1849년 Austen Henry Layard에 의해 발견된 이후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852년 그의 조수, Hormuzd Rassam는 또 하나의 도서관을 발견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두 도서관의 점토책자들은 뒤섞여버리는 통에 정확한 구분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정열적인 장서가였던 아슈르바니팔왕의 노력에 의해 그의 도서관은 번성했다. 학자들은 바빌로니아의 점토책자를 카피하기 위해서 왕에 의해 고용되었고, 이 경이적인 도서관의 자료들은 왕실의 공식, 비공식 문서는 물론이고 행정문서에서부터 종교, 경제, 의학, 천문학, 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실로 위대한 역사의 보고였다. BC612년 니네베의 궁전이 바빌로니아 연합세력에 의해 파괴되어 불에 탈 때,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연성의 다른 기록문서들(wax boards, leather scrolls and possibly papyri)과는 대조적으로 불에 구워짐으로서 보존되어 살아남았다. 대영박물관의 총 30,943개에 달하는 점토판들은 the Ashurbanipal Library Project의 일환으로 연구성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이집트의 도서관
이집트의 문자는 용도에 따라 신성문자(神聖文字 ;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新官文字(신관문자; 히에라틱hieratic), 민중문자(民衆文字; 데모틱demotic)로 나뉘어 진다. 이들 문자체를 한자(漢字) 체에 비유하여 보면 신성문자는 가지런한 해서체(楷書體)이며 신성한 신전이나 비문에, 신관문자는 관리들의 행정사무에 사용된 행서체(行書體) 문자이고, 민중문자는 일반인들의 생활에 사용된 초서체(草書體) 문자라 할 수 있다. 고대이집트의 도서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기록을 보존하고 활용한 장소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 이집트의 기록유물이 적은 것은 미디어가 주로 잘 부서지고 부식되기 쉬운 파피루스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정시대에 궁궐과 사원 혼재
*쿠푸, 카프라 등 여러 왕이 왕궁, 도서관과 사원도서관이 발굴되었다.
*텔 엘 아마르나(Tell-el-Amarna) 궁전도서관 - Amenophis 3세 (BC 1400)
- 왕궁의 기록소에 해당하는 방
- 다량의 점토판 포함
*람세스 2세(오지만디아스, BC 1279-1213 재위) - 테베의 복합건물 내에 "신성한 도서관", "영혼의 안식처"가 있었다고 전함
도서관의 흔적들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고급관리의 묘에서 ‘도서관의 관리인’ 또는 권자본의 관리인‘이라는 명칭이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2600년경으로 추정되는 쿠푸(Khufu)왕은 많은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한 기원전 1300년경 람세스 2세(Ramses)는 테베(Thebes)에 있던 자신의 궁전에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도서관들은 ’영혼靈魂의 시약소施藥所(Dispensary of the soul)' 영혼의 진료소診療所(Healing place of the soul) 로 불리었으며 종교도서관의 성격을 지닌다. 람세스 도서관의 사서로 알려진 아멘 엠 한트(Amen em hant)라는 서지 전문가의 이름이 그의 묘지에서 발견되었으며, 텔 엘 아마르나(Tell el Amarna)의 궁전에서도 설형문자 외교 점토판 기록이 발견되어 기록보존소가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장서는 학문의 신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토트서(Book of Thoth)와 그 해설서 및 주석서가 중심을 이루었고 종교의식에 관한 의례서와 ‘오리시스의 드라마’라는 聖劇(성극)도 있었으나 모두가 전체 내용을 알 수 없는 편린만이 전해질 뿐이다. [출처] 책의 역사 -브뤼노 블라셀著 고대 도서관의 역사 -Lionel Carson著 이종권의 도서관아카데미,/공공도서관경영론 방준필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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